[중간리뷰]로마황제 열전 #10. 콘스탄티누스(기독교인)
로마황제열전
배리 스트라우스
까치
로마 황제 열전저자배리 스트라우스출판까치발매2021.01.25.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 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몇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밀라노 칙령 일부]
로마에 있어서 기독교란, 혹은 기독교에 있어서 로마란 서로 깊은 상호관계와 관계를 갖는다.
첫째, 기독교의 발생과 로마제국의 원수정(제1제정)시대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둘째, 1세기, 2세기를 잇는 제국의 발흥과 풍요로웠던 시기에는 사실 기독교와 제국과 별 마찰이 없었다. 제국이라는 시스템이 시스테믹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종교에 관한 방침이 뚜렸하였고 중립적이었으며 정책의 중심에는 항상 시민이 있었으므로 시민을 위한 기독교였고, 시민을 위한 정책이었다. 다만, 눈여겨 볼것은 기독교의 발생이 유대민족종교에서 출발한 유일신교이교 종말론적 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존의 폐쇄적 유대교와 끊임없는 반목과 분쟁이 있었을 뿐이다.
셋째, 3세기중반을 넘어서면서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이 지역적으로(동방, 서방) 분열되기 시작한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기독교에 있어서 지리적으로 제국의 절반만큼정도의 포교를 이루기에 적당한 시기였으며, 이로 인하여
지리적 동방 <->서방
정치적 동방황제 <->서방황제(4두정치 -> 양두정치)
종교적 기독교 <-> 비기독교
라는 상대적 구도가 우연히 일치하게 된다.(그림참조)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선택.
이 시점에서 서방의 정제를 물려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양분된 로마제국(서방의 콘스탄티누스, 동방의 리키니우스)을 다시 통합하고자하는 꿈이 있었고, 그꿈을 싶현시킬 현실적 정책적 고민과 선택을 하게 되고, 그 현실적 선택이라는 것은 동방에 이미 널리퍼져있는 기독교를 끌어 안는것이었다. 그는 서방정제였으며, 당시 제국 서방은 기독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은 시기였다.
즉, 제국의 서방은 스스로가 통치하던(대를 이어서)지역이어서 시민들의 저항이 전혀 없었으나, 동방은 기독교를 끌어안음 으로서 통합, 통치 부작용을 없애고 시민의 지지로 기대한 것이었다.
그 첫발자국을 뗀것이 “밀라노 칙령”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알았을까? 기독교의 속성을,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몰고올 인간성의 상실과 중세의 혼란,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저주와 살육의 나팔소리였다는 것을.
콘스탄티우스황제 와 기독교.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회로부터 대제라는 존칭을 받은것은 그가 이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독교는 그정도로 욕망을 다스릴줄아는 집단이 아니다.
로마기독교에이은 중세의 역사는 인민과 기독교계의 대립이었다. 인민의 편에 서면 기독교가 분노하고, 기독교를 우대하자면 인민의 피와 땀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에는 만족할줄 몰랐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선택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정책의 방향으로 선택한 이유는 둘중 하나일 것이다.
- 기독교계에서 흔히들 예기하는 ‘진정한 가르침에 눈을떳다’ 라는 개인적인 이유 아니면
- 정치노선의 일환으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자연사한 황제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황제가 훨씬 더 많았던 3세기 후반의 혼미상태에서 제국을 탈출시키기 위한 소위 정국안정의 일환으로의 선택.
하지만, 두가지 모두 정답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뜻을 이어받은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반세기동안 교회를 건설하고 성직자의 사유재산과 교회 재산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주교에게 쥬교관구의 사법권을 위탁하는 등의 우대정책을 편것은 ‘신의 뜻’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제위 세습의 정통성을 획득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기독교계에서는 복음의 전파보다 잿밥의 보전이라는 양측 이해당사간의 박자가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제국을 이루는 시민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페해는 세수부족과 탈세로 이어진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칙령에 이어 기독교의 특혜로 세금면제를 허용한것이다. 처음에는 교회재산, 성직자에 대한 특혜가 점점 광범위하게 되어 교회와 관련된 모든, 예를 들자면 교회귀퉁이에서 잡화를 파는 상인에 대해서도 교회와 관련이있다하여 면세를 허용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제국후기의 독특한 탈세수단을 낳았다.
탈세를 위해 성직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와 자본가 계층이 눈사태라도 난 것처럼 일시에 기독교화한 진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세수의 부족은 특별세나 부가세 등 새로운 세목의 증가로 이어진것은 자명하며, 그 부담은 고스란히 하층시민들에게 떠넘겨진 것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생각할수 밖에 없는것이..
기독교계에서 대제라는 칭호까지 주어가며 칭송하는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의 기독교우대정책이 누구를 위한 정책이며, 그 기독교가 누구를 위한 기독교인가? 내세의 천국 즉 복음을 예비하기 위해 현세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라는것이 그리스도의 뜻이었는지??
기독교의 사제
기독교에서는 신의 권위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성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위에 서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믿는 가르침에서는 신 이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는 신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권위가 된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현세의 권위 위에 군림하는 지고의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실제로는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뜻을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성직자를 통해서 신의 뜻이 전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권위있는 통로는 교리를 해석하고 정리. 통합하는 권리를 갖는 주교였다. 다시 말하면 주교를 ‘자기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신의 뜻’도 ‘자기편’으로 만들수 있다.
기독교의 승리, 시민의 패배, 로마의 몰락.
현존인류의 가장 커다란 불행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일신교와 정치와의 만남이라고 할것이다. 절대 섞여서는 안되는 '피(血)을 섞어 이종교배를 통해 괴물이 탄생해 버렸고, 일신교의 가면을 쓴 괴물은 세상을 파멸로 이끌었다.
제국의 동.서 분열이후 얼마안가 서로마제국은 훈족,고트족,반달족,프랑크족 등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고,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기본적으로 화폐제도의 붕괴로 인하여 교역이 동력을 잃고 물물교환, 자급자족으로 활로를 찾으며 전 유럽이 중세라는 기나긴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고, 그리스도를 등에업은 동로마 제국은 구차한 천년을 더 이어가다가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돌아가게 된다.
유럽이 중세라는 어둠속에서 방황할때 황제들은, 지배계급들은 그리스도를 등에업고 저들의 살을 찌워나갔으나 사회를 이루는 중.하류층 인민들은 오롯이 그 무게를 감당해 나갈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말세론적 구원론을 기본으로 서민들의 눈물을 집어삼키고 내세만을 기도하게 만들었다. 지배계급들이 그들의 살을 피둥피둥 찌우는 동안..
그리스도는 이천년이 흐르도록 어느곳에도 없었다.
낮은곳에 임하라는,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는 이천년전에 죽어 없어지고,
이천년 세월동안 금관을 쓴 기독교라는 괴물이 세상을 삼켜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