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빛
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하지만 여자 없는 남자, 남자 없는 여자는 삶의 절반을 고통속에서 보내야 할 거요.
반쪽의 자신이 점점 불어나 자리를 채울때까지 말이오."
미쉘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내 야니크의 요구로 두가지 조건에 동의한다.
첫째, 무의미한 삶의 연장을 포기하고자 하는 (아니, 삶이라는 형태로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不存在영역 으로의 선택 이었다고 하는게 옳은 표현이 될듯) 그녀에게 남편으로서 현장으로부터 부재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한다. 자살 소동은 야니크 단독소행이어야만 했다.
둘째, 사랑하는 그녀의 소멸이 그 둘사이에 존재하던 사랑의 종속적 소멸이 아니라는것, 미쉘이 다른여자를 만나 사랑을 이어감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후에도 남편 미쉘의 삶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주관적 개념을 통해 '사랑의 빛'의 존재라는 명제를 존재(存在)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에게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이란 전혀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하고 명쾌하며 무기적으로 유출가능한 감정의 이합집산이었다. 다만, 치환의 과정이 지루하게 느껴질 뿐.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세속적이고 일반적이었으며 이에반해 그둘은 무언가 특별하고 영원에 속하는 별스런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는 잘못 만난 사람들이 있어. 그뿐이야.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 외로워서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수 있겠어. 누군가를 만나면 그의 본모습을 보는대신 그를 흥미로운 인물로 만들려고 애쓰지.
…..
명백한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런식으로 갖은애를 다 쓰는거야. 그러다가 서로 거짓을 꾸며내는게 더 이상 불가능해지면 슬픔, 원한, 증오가 되는거야."
[p.42]
어찌되었던 둘은 합의 하였고 미쉘은 예정대로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카라카스행 비행기좌석을 예약하고 샤를드골공항까지 갔으나 다시 망설이게 된다. 결국 카라카스행을 보류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 야니크가 있는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탄 미쉘은 집앞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다 빵, 달걀꾸러미를 들고 길을 지나던 리디아와 조우하고 예상치 못했던 관계의 전개에 빠져든다.
"삶에서의 모든 성공은 실패한 실패일 뿐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p.119]
반년전 자동차 사고로 어린 딸을 잃었고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남편과 헤어짐을 준비하는 리디아.
딸에대한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어가 되어버린 남편, 어눌한 발음의 쥬뗌므(사랑해)만 되뇌이나 그와 사랑의 기억마저도 장마철 녹이번지듯 침식되어간다. 더 이상 회복할 의지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남편과의 수명이 다한듯한 사랑, 그녀는 이미 파괴되어버린 관계를 리셋하고자 한다. 떠나는 방법으로.
미쉘과 리디아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또다른 제3의 관계가 생성되고 새로운 관계는 스스로의 소멸 즉, 죽음(들)로 연결되어 아니크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제1의 현실을 간간히 일깨워준다.
이렇게 확정하지 못하는 현실(現實)과 반현실(反現實)간의, 확정하지 못하는 관계(關係)들과 또 반관계(反關係)들간 표표(漂漂)하는 심리적 모호. 시놉시스의 전개가 억지스럽고 신화(神話)스럽기만 하다.
"모두들 고독하다고 외치는 시대야. 아무도 사랑을 외치지는 않는다고. 고독을 외친다는건 곧 사랑을 외치는 건데 말이야."
[p.130]
존재(存在)와 부재(不在)라는 대립된 의미를 두고 육체적 추구 그리고 정신적 사랑등을 서로 엇갈리게 교차시켜본다. 곧 소멸하고야 마는 육체와 영유하고픈 사랑을 교차존재시킴으로 소멸로부터의 카타르시스를 얻어낼수 있을까? 각각 달리 존재하는 차원들은 어떠한 수단으로 그 배열을 바꾸어도 결코 관통되지 않는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나도 알아. 다만 사랑 없이 살기가 불가능하다는 그 사실 역시 하나의 삶의 방식이야."
[p.155]
작품 제작시기와 로맹가리 개인사의 변화를 미리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의 빛이 발표된 1977년은 스무살 차이가나는 아내 진 세버그와 이혼직후이다. 진 세버그는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로맹가리는 쾌락적 여성편력을 이어간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용서받을 기회를 이미 놓쳐버린자의 넋두리는 아닐런지? 또 다시 몇년후 로맹가리 역시 프랑스 파리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죽음과 세버그와는 관련이 없다는 유서를 남긴다.